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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의 문화재

안양의 문화재

유적지

삼막사 - 전통사찰 제 9호

  • 삼성산(三聖山)에 위치한 삼막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후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중수하였고, 서산대사 등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해져 온다.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에는 나옹대사와 인도 승려 지공이 이곳으로 와서 더욱 융성해졌으며, 동쪽에 불암사, 서쪽에 진관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한양 남쪽의 비보사찰(碑補寺刹)로 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구가 침범하여 불을 질렀으니 법당건물이 타지 않아 왜구가 참회하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241-54
  • 삼막사
3층석탑
3층석탑 3층석탑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112호
이 탑은 삼막사 승도(僧徒)인 김윤후가 몽고군의 원수인 살리타이를 살해, 싸움을 이긴 승적을 기념한 탑이라 전한다. 기단부(基檀部)는 장대석(長臺石) 4매로 하층기단 하대(下臺)를 만들고, 하층기단 면석(面石)도 역시 장대석 4매로 되었으며, 갑석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상층기단 면석(面石)은 4매석으로 짜여 있고, 갑석은 한 귀퉁이가 파실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는데 각층의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마애삼존불
마애삼존불 마애삼존불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94호
마애불은 자연암벽에 감실(鑑室)을 만들고, 거기에 부조(浮彫)한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拂)로 조선후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며, 석굴사원(石窟寺院) 유구(遺構)로 전해 오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의 활달한 부조(浮彫)로 생동감이 넘쳐 조선 불상에서는 파격적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의 표현을 생략한 평판적이고 경직된 상체와 하부로 내려갈수록 얉은 기법 등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적비
사적비 사적비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125호
이 비의 비갓은 팔작지붕형이고 지대석(地臺石)은 땅에 묻혀 있다.
비문(碑文)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조선국경기(朝鮮國京沂) 관악(冠岳) 산맥갑묘행룡삼성산하(山脈甲卯行龍三聖山下) 사명삼막좌유향로봉(寺名三幕左有香爐)" 과 건립연대(建立年代)를 밝히는 "강회(腔淮) 46년 정해(丁亥)"란 명문(名文)이 있어 이 비석(碑石)의 위치는 경기 관악 산맥 삼성산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朝鮮) 숙종(肅宗)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안양사 - 전통사찰 제 10호

  • 오늘날 안양시 지명유래의 근원지인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3년(90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자 이를 이상히 여겨 가보던 중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이 안양사로 전해진다.
    안양이랑 불가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 이 상주하는 청정한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安養世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최영장군이 7층 전탑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여준다.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산 27번
  • 안양사
안양사 귀부
안양사 귀부 안양사 귀부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93호
안양사 귀부는 비신(碑身)과 이수(貽首)는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아있다.
몇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地帶)를 구축했고, 굄대와 귀부가 한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귀부 정상중심에 비좌(碑座)를 설정(設定)하고 비좌의 각 면을 외겹연꽃무늬로 돌리고 있다.
귀갑문(龜甲文)은 6각형이며,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처럼 새겨 사실적이고 귀부 뒷편에 꼬리를 옆으로 새겼다.

마애종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92호

  • 이 마애종은 달아놓은 종을 스님이 치고 있는 장면을 거대한 바위에 묘사한 것으로서, 사각형의 결구형식에 쇠사슬로 연결된 종은 음통(陰通)을 갖춘 비교적 정교한 종루 아래에 약간 벌어진 형태의 자료이며, 종신의 표면에는 상대(上帶)와 붙어있는 유곽(乳廓), 종복(種服)에 있는 연화문(連華紋) 당좌(撞座), 뚜렷하지 못한 문양을 새긴 하대(下帶)가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조각수법이니 종루, 종신의 표현 등에서 신라말 내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마애종의 유일한 예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산32 비산공원 주차장 뒤
  • 마애종

중초사지 당간지주 - 보물 제 4호

  • 당간지주는 중초사지 삼층석탐과 함께 남아 있으며 양 지주가 원상대로 85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대립하여 있다.
    양지주의 상부는 내측면의 면 위에서 바깥 면으로 내려오면서 활모양을 그리며 위로부터 굴곡 없이 깍여졌다. 기저(基底)에는 장대석(長臺石)의 기반석(基盤石)을 지주 사이와 양지주의 외측에 각기 1매씩 깔아서 기대를 삼고 있으며 간대는 지주사이의 장대석 중심부에 원공을 시공간대이다.
    이곳을 중초사지(中初寺址)라고 하는 것은 서쪽 지주의 바깥에 각자(刻字)한 명문(銘文)에 의한 것이며, 이 지주는 신라 흥덕왕 원년인 826년 8월 6일에 채석하여 그 이듬해인 흥덕왕 2년(827) 2월 30일에 세운 조성년대(造成年代)가 명문이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이다.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212-2 (주)유유산업 내
  • 중초사지 당간지주

중초사지 3층석탑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164호

  • 고려시대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지면에 두꺼운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2단 괴임으로된 별석이 놓여 상층기단을 받게 된 단층기단으로 되어 있다.
    기단 중석은 4매석으로 짰는데, 우주(隅柱) 모양이 있을뿐 탱주(撑柱)는 없고 갑석(甲石)은 2매판석으로 덮였는데, 위의 괴임은 1단이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한 돌이고 탑신은 지나치게 작은 초층탑 신석만 남았고 옥개석은 두꺼우며 밑의 받침은 1, 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줄었으며 상륜부는 전부 없어졌다.
    ※ 소재지 : 만안구 석수동 212-1
  • 중초사지 3층석탑

만안교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38호

  • 만안교(萬安橋)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 22대 정조(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州)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과천, 수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노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 하여 시흥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 소재지 : 만안구 석수2동 260 성혜의원 앞
  • 만안교

관악산 망해암

  • 망해암(望海庵)은 비산ㄷㅇ 산19번지에 위치한 전통사찰로서, 봉은사말사지(奉恩寺末寺誌)에 신라때 원효대사가 창건했고 조선 순조 3년(1803)에 정조대왕의 모친인 홍대비(洪大妃)께서 중건(重建)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망해암이란 암자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 시계가 탁 트인 관악산의 망해암에 올라 안양시가지와 서해일몰을 감상하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절도로 그 풍광이 빼어나다.
    ※ 소재지 : 만안구 안양 2동
  • 관악산 망해암

수리산 최경환성지

  •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의 아버지이다.
    담배촌(안양9동)에 정착, 교우촌을 이루고 천주신앙을 전차하던 중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하던 기해박해가 이러나자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력하며 돌보던 중, 포졸들에게 압송되어 형벌을 받다가 그해 9월 12일 포청옥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 소재지 : 만안구 안양 9동 1151-7
  • 수리산 최경환성지

평촌 지석묘

  • 평촌 지석묘의 형식은 모두 남방식으로 하부구조는 매우 다양하며 석관식과 석곽실, 다곽실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은 돌화살촉과 민무늬토기(無文土器)등이 있으며 복원된 지석묘는 평촌동, 신촌, 귀인부락 등에서 1990년 발굴 조사되어 현재 동안구 갈산동 자유공원 내에 보존되고 있다.
    평촌지석묘의 발굴로 안양천을 낀 평촌지역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지임을 알 수가 있다.
    ※ 소재지 : 동안구 갈산동 1112
  • 평촌 지석묘

석수동 석실분 - 경기도 기념물 제 126호

  • 석수동 석실분(石室墳)은 삼성산의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뻗어 내려온 구릉(丘陵)의 정상부에 화강암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삼국시대의 것으로 고분은 산의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의 할석(割石)을 이용해 동·서·북벽을 면을 맞추어 축조하였고 남벽은 대판석 1매로 축조하였다.
    동·서벽은 5~6단으로 쌓여있고 북벽(北壁)은 크고 작은 돌을 6~7단으로 쌓았다.
    석실의 뚜껑은 3매의 판석(板石)을 사용하였다.
    ※ 소재지 : 만안구 석수1동 산53-3
  • 석수동 석실분